아이누모시리와
두 개의 바다
太平洋
동에조치(東蝦夷地)와 와진치(和人地)의 경계
태평양(분화만)의 야쿠모 지역은 ‘오텟펫(한자 표기:落部)’ ‘눞타이(한자 표기:野田生)’ ‘유랖(한자 표기:遊楽部)’ 등 아이누어에서 유래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으며, 구로이와 기암 등 아이누 전설과 연관된 경승지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에도시대 후기에 에조치(蝦夷地:아이누 거주지)와 와진치(和人地:일본인 거주지)의 경계를 변경하면서 경계의 입구인 ‘관문’이 에조치 측 입구인 ‘야무쿠시나이(山越内) 집회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에조치로의 왕래를 관리하였다.
※太平洋(태평양)
日本海
서에조치(西蝦夷地)와 와진치(和人地)의 경계
일본해 측에서는 청어잡이 등이 왕성하게 이루어져 일찍부터 와진(혼슈 출시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마츠마에 번(松前藩)은 일본해 측에 위치한 구마이시(熊石)까지를 와진치, 그 앞쪽을 서에조치(西蝦夷地)라고 하여 아이누와 와진의 거주 구역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구마이시에 번소(番所: 망 보는 곳)를 설치하여 아이누 지역에 들어가는 와진의 배를 관리하였다. 에도시대에는 에사시(江差)에서 기타마에선(北前船)을 통해 혼슈와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구마이시는 청어잡이로 번성하였다.
※日本海(일본해)
마츠마에 번은 아이누가 사는 장소와 와진이 사는 장소를 나누었는데 일본해 측은 구마이시까지를 ‘와진치’, 그 앞쪽을 ‘서에조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평양 측을 ‘동에조치’라고 하였다. 머지않아 와진치는 분화만 측의 유이(由追)까지 넓어졌다.
도남에 있는 야쿠모와 아이누의 역사
도남 지역은 홋카이도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와진이 이주한 지역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선주민인 아이누가 전통적인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취락지가 빠르게 감소하였다. 그래서 도남의 아이누 관련 자료는 전국적으로도 극히 드물지만, 야쿠모초의 유랏푸 아이누인 시이쿠(椎久) 자료(현재는 시립하코다테박물관 소장)와 오토시베(落部) 아이누 피리카회 자료(현재는 마츠마에초 교육위원회 소장)라는 2대 자료군이 남아있다. 또한 에도 막부 말기에는 와진이 에조치의 조사・순찰을 실시했기 떄문에 많은 수기가 남아있다.
스가에 마스미(菅江 真澄)와 야쿠모
도남에 있는 에조치를 여행한 와진 스가에 마스미(菅江 真澄)는 아이누 사람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홋카이도 각지에 사는 아이누의 생활 문화를 삽화와 함께 상세하게 남겼다.
『마스미유람기(真澄遊覽記)』국립국회도선관 디지털 컬렉션
마츠우라 다케시로(松浦 武四郎)와 야쿠모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홋카이도 전역을 걸어서 조사한 마츠우라 다케시로(松浦 武四郎)는 분화만 측에 있는 유랏푸강을 방문한 당시의 모습을 『동에조치일시(東蝦夷日誌)』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마츠우라 다케시로는 에조치 조사에 나설 때마다 분화만 측의 와진치 경계에 있는 유이이나리신사(由追稲荷神社)를 참배하여 공물을 바치고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현재 유이이나리신사에 마츠우라 다케시로가 지은 와가(和歌:일본의 정형시)가 걸려 있다.
선주민 아이누와 야쿠모에 이주한 사람들과의 교류
메이지시대에 들어서면서, 유랏푸강 하류 지역에 오와리 도쿠가와가(尾張 徳川家)가 대규모로 이주하였고, 도쿠가와가 개간시험장이 개설되었다. 나중에는 도쿠가와농장으로 바뀌었다. 다이쇼(大正)시대가 되면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당주인 도쿠가와 요시치카(徳川 義親)는 선주민인 아이누 사람들과 곰 사냥을 하면서 깊게 교류하였다. 야쿠모초에는 아이누와 이주민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온 역사가 있다.